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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어머니

Opinion

by liaison 2006. 8. 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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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봉사활동 떠나는 아름다운 청년 정준

평균 시청률 30%를 넘은 인기 드라마 <별난 여자 별난 남자>를 끝내고 훌쩍 아프리카로 떠나는 정준. 20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의미 있는 봉사의 길이다. 스물일곱 아름다운 청년에게 듣는 봉사와 연기, 그리고 그를 이끌어준 어머니 이야기.

“내 인생의 또다른 목표는 봉사와 선교, 홀어머니 밑에서 인생을 배웠다”


<별난 여자 별난 남자>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비고용직으로 취직해서 멋지게 성공하는 ‘씩씩 청년’ 장기웅 역을 멋지게 보여준 정준. 15년 연기생활 중 체력적으로 이렇게 힘든 적이 없었다며 귀엽게 불평한다. 드라마가 끝나니 시원섭섭하지만 오랫동안 준비해온 봉사활동을 떠날 수 있게 돼서 가슴 떨린다고. 아프리카로 출국하기 이틀 전인 지난 7월 12일, 모범 청년 정준을 만났다.

2년간의 준비가 결실을 맺는 순간


<별난 여자 별난 남자>는 정준에게 의미가 큰 작품이다. 고학력 사회에 대응해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준 장기웅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앞장서 봉사를 실천한 계기가 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 사진 St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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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연기생활인데도 일일연속극은 정말 체력적으로 많이 버거워요. 그래도 즐겁게 진행할 수 있었던 건, 같이 연기한 배우들이 너무 좋아서예요. 오랜 기간 같이 연기하면서도 데면데면 지내는 경우가 많은데, 저희는 달랐어요. 어버이날에 선배님들께 카네이션 달아드리자고 의견을 내놓자마자 김아중씨가 먼저 나서서 사왔거든요. 다들 서로의 말을 잘 따라주는 좋은 친구들이었어요. 김아중씨나 고주원씨하고는 지금도 전화로 자주 연락해요.”

더욱 의미가 있었던 건 그들과 함께 복지관을 찾아 장애우들과 놀아준 기억이다. 5만원씩 걷어서 직접 케이크와 과자를 사들고 가기를 세 번. 돌아올 때마다 아이들을 도운 게 아니라 더 많은 걸 얻어간다는 느낌이었다. 정준 스스로 계획을 세워 시작한 첫 봉사활동이기도 하다.

“늘 봉사를 하겠다고 마음은 먹고 있어도 쉽게 기회를 못 잡았어요. 그러다 활동을 2년 동안 쉬고 집중적으로 기독교 청년단에서 일했죠. 흔히 인기를 먹고사는 탤런트가 연기를 쉬는 게 어려울 거라 생각하시는데 40일 금식을 하면서까지 굳게 마음먹은 터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거기서 만난 목사님께 꿈을 털어놓았더니 같이 NGO 일을 해보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세계 어린이를 돕는 SFI(서빙 프렌즈)에서 홍보이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이름만 건 홍보이사가 아니라 직접 기업의 후원을 받기 위해 발로 뛰어다녔죠. 창립 때부터 참여한 단체라 더욱 정이 가요.”

이번에 아프리카로 구호활동을 떠나는 것도 서빙 프렌즈 활동의 일환이다. 20일의 짧은 일정 동안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우물 개발과 학교 건축에 힘을 보태고, 현지 보건소를 도와 이동진료 활동에도 나설 예정이다. 아울러 나이로비의 난민촌 키베라도 방문, 보건소를 만들고 에이즈보육원에서 봉사활동도 벌이려고 한다. 작년 동남아 지진해일 참사 때 같은 단체 멤버들이 구호활동을 떠나는데도 드라마 촬영 때문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 두 배로 열심히 뛸 계획이다. 아프리카에 다녀온 후에도 현지에서 한 구호활동을 홍보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활동은 연말까지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는 아예 봉사활동에 좀더 전념하기 위해 1년에 1~2편만 찍기로 결심했다. 그의 굳은 심지를 알기 때문에 소속사도 이해했다.

“오히려 네티즌들이 저희 활동을 차갑게 보는 것 같아요. 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굳이 외국까지 나갈 필요 있냐’는 냉소적인 발언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 아프리카에는 태어날 때부터 에이즈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에이즈에 걸린 엄마들이 워낙 많은데, 그 아이들이 모유만 먹지 않으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거든요. 몇 만원의 분유값이 한 아이의 일생을 에이즈로부터 구출할 수 있어요.”

에이즈로 고생하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돕기 위해 따로 교육을 받아서인지 그의 설명이 조리 있다. 한국 기업보다도 오히려 외국 기업들이 선뜻 도움을 주어서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고. 우리나라도 이제 더 힘들고 가난한 나라를 돕겠다는 선진국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연기를 중단하고 몇 개월 봉사활동만 한다는 데 어머니는 선뜻 찬성하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준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그의 어머니는 이미 필리핀, 중국, 몽골을 돌며 봉사활동을 펼친 그의 ‘봉사 선배님’이다.

“어머니의 추진력을 보며 많이 반성했어요. 저는 이렇게 해외 봉사 한 번 나가기 위해 구호물품 협찬 받고, 기업의 관심을 끌어내고, 온갖 서류로 계획을 세우느라 몇 달이 금세 가는데 어머니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 도움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일주일 만에 준비를 끝내고 떠나시거든요. 단순하고 무모해 보이지만 자연스럽게 봉사하는 어머니 모습에 감동도 많이 받았어요.”

홀어머니 밑에서도 어리광 없이 자라다


정준이 바쁜 연기활동을 뒤로 미루고 이처럼 봉사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건, 어릴 때부터 늘 가난한 이웃을 돕던 어머니의 모습에서 배운 삶의 태도 때문이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불쌍한 사람에게 돈이나 빵을 건네는 어머니 모습이 어릴 때부터 익숙하다.

“초등학교 때 고아원 아이 하나가 반에서 따돌림을 당했어요. 어머니께 말씀드렸더니 집에 데려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밥과 옷을 주시고 집에서 재우기도 했어요. 심지어는 저보고 같이 고아원에 가서 자라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엔 놀랐지만 가난하고 외롭게 사는 친구들을 이해하고 살피라는 뜻을 알고 그대로 했어요. 우리집도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단출한 살림이라서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았는데도, 한 번도 힘들다고 느끼지 않은 건 늘 남을 도우며 살아서 ‘마음만은 부자’였기 때문이었어요.”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이지만 한 번도 아버지가 보고 싶다며 억지를 부린 적이 없다. 철이 빨리 든 탓도 있지만, 어머니가 워낙 엄해서 어리광을 부릴 새가 없었다.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이 혹여 버릇없이 자랄까, 혹시나 약해지지 않을까 두려워 세게 껴 안아준 적 한 번 없고 손 한 번 꼭 잡아준 적이 없다고.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매를 드셨어요. 방학 때 새벽 기도를 가기로 했으면 한 번 부를 때 일어나야 해요. 교회를 빠지고 놀러가서 맞은 기억도 나요. 하지만 어머니는 약속한 게 아니면 제게 욕심을 부려본 적이 없으세요. 제가 반에서 꼴등을 하고 들어왔을 때도 어머니가 굉장히 초연하시던 기억이 나요.”

한 번 한 약속은 지키도록 엄하게 다스리지만, 나머지 영역에서는 그를 믿고 맡기는 어머니였다. 그러다 보니 아들이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후에도 촬영장을 쫓아다니며 따로 돌본 적이 없다. 보다 못해 정준이 출연한 청소년 드라마 <사춘기>의 감독이 어머니를 불러서 부탁할 정도였다. 감독으로서는 어른들이 대부분인 촬영 현장이나, 때로는 거친 일도 있는 연예계에서 어머니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한 말이었지만 정준의 어머니는 아들 혼자 알아서 할 일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어요. 누구보다도 저를 아끼신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어머니가 며칠씩 산에 가서 기도하실 때도 가지고 가는 기도 제목 중 첫 번째로 제 이름이 써 있어요. 늘 제가 잘되기를 기도해주시는데 삐뚤게 나가선 안 되죠.”

이제 환갑을 넘긴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서 TV를 보는 뒷모습을 보면 ‘많이 늙으셨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리다. 가서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도 가득해진다. 하지만 자신이 약해질까 봐, 어머니가 약해질까 봐 마음으로만 안아드린다. 그렇게 남다른 방식으로 모자는 둘이서 씩씩하게 살아왔다.

마음 비우고 봉사하고, 욕심 가지고 연기한다


정준은 흔히 말하는 연기에 대한 재능도, 끼도 없다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렇다고 연기를 하고 싶어 한 적도 없었다. 늘 어머니처럼 평생 선교활동과 봉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5학년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연기학원에 데리고 갔다. 학원이라면 한 달을 채 다니지 못하는 의지박약 초등학생 정준이 연기학원은 1년을 넘게 다녔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다.

“어머니는 평생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제 말을 마음에 담고 계셨나 봐요. 유명해진다면 제가 하는 일이 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연기자를 시켜야겠다고 마음먹으셨대요. 어머니 덕분인지 연기학원에서 순조롭게 배우다가 엑스트라 한 번 하지 않고 단번에 드라마 배역을 따냈어요.”

황인뢰 감독의 아동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한 이후, 인기 청소년 드라마 <사춘기>의 주역을 따냈다. 어릴 때부터 연기자만 꿈꿔온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그에게는 큰 작품만 들어온 셈이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갑자기 유명해진 탓에 그에게는 또래와 보낸 학창시절의 추억이 거의 없다. 학교에 가도 그는 아이들과 다른 ‘연기자’일 뿐이었다. 매니저가 “왜 방송국에서는 그렇게 활개치고 다니면서 학교에만 들어서면 어깨가 축 처지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여느 아이들과 다르게 취급당하는 게 괴로웠어요. 저는 유명한 아이니까 실수를 하면 안 되고 옷에 뭐가 묻어도 안 되는 거예요. 혹시 구멍 난 옷이라도 입으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행동해서 제겐 상처가 되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일부러 매일 구멍 난 옷을 입고 학교에 갔어요. 저 나름대로는 편견으로 가득한 시선에 대항하는 행동이었죠.(웃음)”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연기에만 열중했고, 친구도 연기자들만 남았는데 대학마저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바로 신학과였다. 평생 선교활동을 하며 살고 싶던 그에게는 딱 맞는 학과였지만 문제는 수능 점수. 그는 재수를 하면서 악착을 부린 끝에 총신대 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생이 된 후 같은 신앙을 가진 여학생과 교제를 하기도 했지만 헤어졌다. 교제에 관해서는 신앙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나중에 그가 배우자를 신앙으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룹 지누션의 멤버 션이 배우 정혜영과 결혼하면서 보여준 모습에서 많이 배웠다. 션이 아내의 신앙이 독실해지도록 도운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대학에 그렇게 어렵게 들어갔는데 2년을 이어서 다니질 못했어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북경반점>을 비롯해서 영화 네 편의 섭외가 들어온 거예요. 정신없이 영화를 찍으면서 연기의 맛을 처음 알았어요. 자연스럽게 공기처럼 생활에 스며든 연기가 실은 제가 너무 원한 활동임을 그제야 깨달았어요.”

그때부터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정신없이 연기에 임했다. 봉사와 연기는 그가 평생 동안 할 과업이다. 봉사는 그가 계획한 대로 다 이뤄질 수 없기에 마음을 비우고 해야 하지만 연기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아직도 드라마 <사춘기> 때의 모습을 벗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조급해하지 않는다. 연기야말로 인생을 걸고 승부해보겠다는 생각이다.

“<별난 여자 별난 남자>를 끝내고 운동으로 5kg을 뺐어요. 아직 더 빼야 하지만 그것 때문에 초조하지 않아요. 어차피 저는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연기할 테니까요. 몸은 나이를 먹어도 모습은 늘 한결같은 안성기 선배님 같은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사실 저희 어머니가 그 선배님 기사를 보시며 이런 연기자가 되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어떤 선택이든 그 뒤에는 어머니가 산처럼 서 있다. 마마보이 아니냐고 물으니, 맞다며 당당하게 웃는다. 마마보이인 게 자랑스러운 이 남자, 누구보다도 의젓한 모습이다.

출처 : 우먼센스

박미혜 기자()/사진=권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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